조선시대 남자 귀걸이
조선의 전통문화
왜인과 구분하기위한 변신
조선군대에서의 공을 위한 음모
귀걸이는 조선의 전통문화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명나라 사신 접반사,이덕형과 경리,양호의 은밀한 대화
“근자에 조선군대에서 자신의 공을 세우려는 자들이 조선 사람을 죽여 마치 왜적인 양 꾸미는 일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대체 이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뭐? 조선인을 왜군으로 둔갑시켜?”
-조선왕조실록 선조30년-
“왜인첩자를 구별할 유력한 단서가 있으니 지금 당장 병사들의 귀를 수색하라”
유력한 단서: 귀(耳)
전쟁중 떨어진 명령
지금부터 병사들의 좌,우 귀를 샅샅이 살펴보라.귓볼에 구멍이 있으면 조선인이요 구멍이 없으면 왜인이다!
대체 왜?
귀고리 구멍. [당시 조선인들 특히 남자들은 귀고리를 하기위해 귓불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
머리카락 한올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유교의 나라.
머리카락 한 올도 함부로 하지않았던 조선 그런데 정말 조선시대 대부분의 남자들이 귀고리를 했을까?
1997년 4월 서울 은평구.
조선시대 무덤 발굴지에서 나온 예사롭지않은 희귀유물 한 점.
둥근 열매 모양의 장식이 달린 은제 귀고리.
재질: 순도99.9%의 은
크기: 구슬의 지름 약2cm
무게:6.03g 정도
무덤의 주인:남자.
금은 제품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사대부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금은의 사용을 일절 금한다.
-세종실록 ,1년1월6일자-
조선시대 남자의 귀고리:착용자의 신분과 권위를 표현하는 수단.신분이 높을 수 록 금은이 굵은 귀고리,신분이 낮을 수 록 금은이 얇은 귀고리.
조선시대 남자의 귀고리는 나이를 막론하고 남자들의 사치,와 멋 부리기 용도.
그렇다면 언제부터 남자들은 귀고리를 했던 걸까?
그림속에서 포착된 남자의 귀고리
귀고리를 한 고구려 사신,신라 사신,백제 사신.
1500년을 지켜오던 풍속.그러던 1572년5월. 명나라 사신을 만난 선조.
“귀고리를 한 조선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오랑캐의 풍속이 아닙니까?”
갑작스럽게 선조가 내린 어명!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선조실록 5년9월28일자-
유교의 발달과 더불어 눈엣가시가 된 귀고리.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남자들의 귀고리 문화.
조선시대 남자는 귀를 뚫었다. 귓불에 난 귀고리 구멍은 조선인의 징표였다.
<자료 출처: EBS역사채널>